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 과신뷰 이 달의 주제 : 기후위기
적을수록 풍요롭다
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과신뷰 vol.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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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장 : 김양현 │편집위원 : 박아론 이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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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주제 칼럼1 "기후위기 시대-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꿈과 그 걸림돌" (우석영)
- 주제 칼럼2 "기후위기 시대, 모두를 위한 '녹색/기후'교회" (유미호)
- 아카데미 리뷰 "플립러닝 기초과정을 마치며" (이호섭)
- 이달의 핫클립 「기후위기와 자유민주주의가 무슨 상관이죠?」 (박일준)
- 사무국 소식 (박아론, 이슬기)
- 이달책 《적을수록 풍요롭다》 (박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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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기후위기 시대
-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꿈과 그 걸림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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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우석영
철학자, 《기후위기행동사전》 공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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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른 이후로 나는 세계 이곳저곳에서 살아왔다. 고국 땅을 떠나 산 세월이 그리 적지는 않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한국에 다시 와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의 계절이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감각이 다른 한국인들보다는 조금 더 있다고 생각한다. 몸으로 아는 앎과 감각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폭염과 추위 사이, 잠시 열린 꿈결 같은 시간대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재 한국인화 된 나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지금을 즐기면서도 서둘러 긴 혹한기에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 땅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몸이 알아서 내게 말해준다. 24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라디오에선 한로다, 상강이다, 입동이다, 또 뭐다 라며 잘도 떠들어대지만, 기후변화 시대에 절기라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 있겠는가. 폭염 아닌 여름은 이제 생각하기 어렵고, 약 한 달 정도 지속되는 ‘몽유도원’ 같은 이 시간이 지나면 혹한의 긴 시간대가 이곳을 점령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이 끝도 없는 터널처럼 이어지다가 “기후변화의 시대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한탄이 잦아들 무렵이 오면, 겨우 겨우 봄이 찾아올 것이다. 실로 기적 같은 사건이지만, 그 봄은 가을만큼이나 빨리 우리 곁을 떠난다. 그렇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은 아니다. 이 짧은 꿈이 끝나면, 우리는 또 냉풍기가 가동되는 21세기의 냉동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진짜 집이 마을, 도시, 국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 안에 있다는 감각이 깨어날 만도 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집이 지구에 너무나 가까워졌다는 점. 이것은 어쩌면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준 거의 유일한 선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계기는 대개는 불행의 경험이다. 지난 봄 산불로 집을 잃은 강릉 사람들의 불행, 지난 여름 수해로 고생한 경상북도 예천 사람들의 불행, 충청북도 청주(오송) 지하차도에 갇혀 죽어간 이들의 불행, 수해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이승과 연을 끊고 만 고(故) 채수근 상병의 불행도 여기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불행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전 지구에서 일어난/일어나고 있는 불행이라는 빙산 가운데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한국에서 올 여름 폭염은 6월 말, 7월 초에야 시작되었지만 동남아나 인도, 중동, 남유럽, 미국 등지에서는 이미 5월 말, 6월 초부터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얼마나 뜨거웠던 것일까? 과연 나사(NASA)의 고다드 우주 연구소(GISS)는 놀라운 측정 결과를 발표했다. 1880년 세계 기온 기록이 시작된 이래 2023년 여름이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름은 앞으로 수십 년 간 찾아올 여름 가운데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미국의 해양대기청(NOAA)은 올해 지금까지 미국이 겪은 극한적 기후 사건이 총 23건에 달하며, 피해액이 역대 최고라고 밝혔다. 물론, 이 23건의 사건 가운데에는 최소 115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피해액이 5조 원이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이는 하와이 마우이 섬의 산불 피해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올해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장 큰 고통을 겪은 나라는 캐나다라고 봐야 한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캐나다의 산불은 지금까지(지금 이 순간에도 불타고 있다!) 약 18만 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면적(캐나다 숲의 약 5%)을 태웠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탄소는 500메가톤에 육박하는 것으로 측정되고 있다. 영향을 받은 주는 10개의 주, 3개의 준주, 즉 전 국토로 각지에서 숱한 이재민이 발생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각종 데이터는 문제의 완화가 아니라 악화를 한결 같이 지시한다. 매년 9월이면 최대 해빙 면적을 보이며 해빙의 몸집을 키우는 남극에서 올해는 역대 최저치의 해빙 면적(1696만㎢)이 관측되었다. 해빙 용해 시점도 1981~2010년의 30년간엔 그 평균 시점이 9월 23일이었지만, 올해는 2주 빠른 시점인 9월 10일인 것으로 관측되었다. 내가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현재, 하와이 마우나 로아 관측소에서 측정된 이산화탄소 농도는 418.21ppm인데, 안정적인 기후 조건의 지표로 제시된 350ppm을 훨씬 웃도는 수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슬픈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지구의 바다는 계속해서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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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빙하의 감소 추이 그래프 지속적인 감소를 보여준다. 더얇게, 더좁아진다.
(자료제공 :N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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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해빙의 변화 1979(좌)과 - 2022년(우) (자료제공 : N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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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기온 변화, 1884년(위쪽)부터 가장 최근인 2022(아래)까지 (자료제공 : N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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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곳의 기후행동은 보잘 것 없기만 하다. 기후위기가 진짜 우리의 문제라고 우려하는 사회적 목소리는 결코 적지 않지만,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처하는 행동은 국가/지자체 차원에서도,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그 효과가 적이 의문스러운 수준에 머물고 있다. 쏟아지는 위험 경고와 미미한 행동 간의 이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틈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크게 네 가지가 원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과학과 실감 간의 간극이라는 전 세계인에게 공통되는 사안이 있다. 과학적 지식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기후변화의 현실은 오직 기후충격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에게 실감된다. 문제는 홍수, 호우, 산불, 태풍 같은 기후충격이 (시공간적으로) 간헐적으로만 경험된다는 점이다. 누구도 언제나 기후충격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디서나 기후충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곳에서 발생한 지난 여름의 수해는 몇 개월이면 까맣게 잊히고, 현재 발생 중인 기후재난은 한국 밖 다른 나라의 일이기 쉽다. 이러한 시공간적 간헐성 탓에 우리의 실감은 쉽게 허물어지고, 충격을 받았을 때 가까워졌던 과학과 실감의 거리는 다시금 벌어지고 만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보다 쉽게 일어나는데, 그건 한반도가 오랫동안 기후충격의 사각지대나 다름없는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50일 폭염 이후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이들이 꽤 늘었지만,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수해(태풍, 홍수)로 고통 받는 동안에도 한국만은 기이하게 안전한 쪽이었고 산불 피해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소소한 수준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피해가 적으니 천만다행이지만, 현 세대의 탄소 감각을 무디게 하니 미래세대로서는 불행 중 불행이다.
둘째, 인간 뇌의 특정 성향이 문제다.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반복된 자극/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없는 경우, 그 자극/문제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해당 정보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기후변화라는 정보가 우리의 뇌를 자극한 지는 10년이 훌쩍 넘지만, 이를 속 시원히 해결하는 해법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자꾸만 이 사안을 뒷전으로 미루거나 마주하기를 회피하는 대중의 심리는 사실 이해할 만한 것이다.
셋째, 한국은 에코모더니즘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한편으로 기후위기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대비하려는 흐름도 있지만, 이곳의 주류와 다수는 결코 그 흐름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 챗 GPT 같은 신기술에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형 휴대폰에 열광하며, 인공위성의 성공적 발사를 한 점 의심의 시선 없이 자축하고, 2030 부산 엑스포를 기대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욕망의 거대한 강물은 기후위기 같은 문제도 언젠가는 테크놀로지가 해결하리라는 식의 에코모더니즘과 당연히 정서적 친화성을 보인다. 문제는 바로 이런 식의 하이테크 개발 과정 자체가 다량의 탄소배출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제 살 깎기’라는 자명한 현실을, 이 욕망의 강물에 휩쓸린 그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걸까? ‘한국의 도약’이라는 오래된 꿈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이곳의 초라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이 땅의 꿈이 되어온(1905년 경 부터 1945년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피억압 기간에 이 꿈은 결코 꺾을 수 없는 절대적 꿈이 되고 만다.) 한국(조선)의 세계 도약이라는 꿈. 누구도 욕보일 수 없는(치욕의 역사가 너무 길었다!) 국가로의 도약이라는 이 꿈 그 자체를 손가락질 할 수야 없겠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속한 경제성장, 탈 가난의 역사 자체를 우리 자신이 평가절하하거나 비아냥거릴 수도 없겠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야기된 생태환경 파괴의 흑 역사에 눈을 감는 태도 역시 결코 용인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지난 10월 6일 국회에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공단 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재적의원 242명 가운데 단 6명에 불과했다. (찬성 223, 기권 13) 자연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개발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결코 국회의원 집단에만 국한될 수 없는 한국의 집단적 망상을 이 표결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망상이 결코 한국민족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산천을,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좋은 삶으로 여겼던 예맥족(한국민족)의 오래된 정신과 마음새에 비추어볼 때 극히 반한국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 더욱이 세계의 한국 인정이라는 꿈 역시 이미 달성한 꿈이지 않은가! (얼마나 인정받아야 성이 차겠는가!) 그러니, 이제 부디 새로운 꿈을 꾸자. 지구가 입을 열어 인류에게 다른 삶을 촉구하고 있는 현실에 (다른 세계인들과 함께)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다른 문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꿈을 부디 꾸자.
그러나 이러한 꿈의 변경, 꿈의 탈바꿈은 이곳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진실 된 기후행동을 가로막고 있는 네 번째 걸림돌 때문이다. 무엇일까? 더 많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를 매개로 제 규모를 키우는(성장시키는) 자본주의에 너무도 깊이 매몰된 일상적 삶이 바로 그것이다. 상품의 과생산과 과소비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범에 속하기에, 자본주의와 사랑에 빠진 신체와 기후행동은 당연히 상극의 관계에 놓인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레오니아Leonia’라는 이름의 가상의 도시가 등장한다. 이 도시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도시 거주자들이 새것을 광적으로 즐기는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매일 아침 이들은 새 옷(신상품)을 입고, 최신모델 냉장고에서 새로운 캔 음식을 먹고, 최신형 라디오에서 나오는 최신 뉴스를 들으며 산다. 더 특이한 것은 이것들의 유효기간이 단 하루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보도에는 어제 나온 폐기물들이 실린 폐기물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청소부들은 당연히 천사 같은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이렇게 폐기된 사물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레오니아 시민들은 ‘폐기물로 이루어진 파괴 불가능한 요새’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축하게 된다. 결국 이 요새는 도시 외곽에서 도시를 포위해서는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한다……. 이것은 그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 이곳의 레오니아를 구할 방도는 칼비노의 레오니아 이야기에 이미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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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기후위기 시대, 모두를 위한 “녹색/기후”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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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열며
최근 들려오는 기후위기에 관한 각종 지표와 현상들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기후위기가 우리의 현재는 물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세계, 커다란 위기의 풍랑 위로 몰아넣고 있다. 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경고해왔지만 우리는 외면해 왔다. 그로 인해 전 세계는 폭염뿐 아니라 이상 기상 현상과 그로 말미암은 식량 위기, 경제 위기, 안보 위기, 양극화 심화 등의 문제를 경고가 아닌 현실로 겪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교회가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기 때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반드시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사 43:19)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그 미래를 현실화해가는 이들을 두셨다. 화석연료를 대신할 풍력과 태양에너지, 새로운 방식의 운송수단, 녹색 일자리,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등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이고 근원적으로 실천해온 이들이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지구가 버티고 있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통해 새롭게 하는 일을 행하고 계신다.
다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지난 100년 동안 약 1도가 상승했는데, 상승하는 속도가 자연보다 10배나 빠르다. 지난 80만 년 동안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300ppm이상으로 상승한 적이 없었는데, 현재 이산화탄소 농도는 420ppm 가까이 치솟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가 지난 30년 동안 6차 보고서를 내면서 인간의 책임을 밝혀왔지만 우리는 부인하거나 침묵했고 책임을 전가해왔다. 그 ‘책임이 90% 이상 우리에게 있다’고 밝혀진 이후로도 10년의 시간을 허비했고, 이제 ‘명백한(99~100%)’ 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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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너지, 에너지 자립마을 그리고 교회
우리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가 살길은, 위기를 분명히 인지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보다 앞서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사회 속에 녹색(창조)의 빛을 발함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교회적으로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내 위치나 모임 인원에 상관없이 ‘탄소제로 녹색교회’를 결심하고 선언해볼 일이다. 탄소제로 녹색교회는 멀리 있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채는 교우들이 늘어나면, 공동체 안에 자연스럽게 창조의 빛이 짙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잠재적 녹색교회다. 이를 드러내게 돕는 것이 자기 선언이다. 누구든 모임을 만들고, 비전에 동의하는 이들을 모아 ‘탄소제로 녹색교회’ 선언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교회와 사회의 핵심리더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폭넓은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한 과제인데, 창조세계의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계속 소통한다면 그들 역시 기꺼이 함께 걸을 것이다.
둘째 단계는, 교회의 탄소 배출량을 산출하고 그 출처를 분석하는 일이다. 전기와 가스 등 건물 에너지, 교통, 물, 음식, 종이 사용량 및 쓰레기 배출량에 대해 단순히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구체적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지금의 기후위기에 대한 자기 책임을 확인하게 해주며, 지금껏 지구에 부담을 준 생활방식에 대한 회개와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돕는다. 스스로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저울 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교회가 줄일 수 있는 배출량이 어느 정도이고, 그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얼마이며,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셋째 단계는, 탄소 배출을 줄이거나 멈추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모니터링 작업은 필수다. 그래야 추후 거둔 성과를 평가하고 아쉬운 점을 되짚어 전 과정을 더 나은 실천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전 교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실천에 따른 효과를 공유해 참여를 독려하고 지속적 실천을 이끌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거나 힘겨워하는 이는 없는지 살피고 배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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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시도로 실질적 탄소중립의 효과를 내려면 다음 세 가지 실천이 필수적이다.
첫째는 ‘영성’ 즉 ‘성서와 환경’ ‘생태 영성’에 대해 공부하면서, 창조세계의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구를 위한 중보기도’(Christian Earth Hour) 시간을 갖는다면, 위기를 넘어서게 하는 담대한 행동도 가능할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창조의 선물인 자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깊이 감사할 줄 알게 된다면, 지속 가능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순절 등 신앙 절기에 맞춰 ‘경건한 40일 탄소금식’이나 ‘플라스틱 감축 40일’ 등으로 훈련하면, 창조세계를 돌보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교육할 뿐 아니라 선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교육’이다. 녹색교회(학교) 교육은 창조의 부르심과 신음하는 동료 피조물을 기억하며, 다량의 탄소를 배출하는 옛 습관을 버리고 탐욕에서 자유로운 새들처럼 가볍게 살게 하는 데 중점을 둔다. 가난한 이웃이나 동식물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고, 지속가능 하고 에너지효율이 높은 생활을 하며, 창조세계와 더불어 정원을 가꾸는 일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가볍게 먹고 입고 머물며 쓰레기 없는 삶을 살면서 지역사회는 물론 지구의 이웃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탄소중립은 몇몇 개인의 실천을 넘어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후에라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계속 함께 공부하며 공동체를 단단히 세워가야 하니, 교회 내에 「탄소제로 녹색교회를 위한 ‘환경선교사’ 과정」과 같은 교육을 진행해볼 것을 권한다. 특별히 교육에 있어서는 다음세대가 중요한데, 지금의 위기에 대해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또한 환경력에 따라 월 1회 지구를 기억하는 ‘지구(묵상) 주일’을 지켜 신음하는 피조물 앞에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요 만물의 화해자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 자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가능하다면 교회학교나 부서(환경부) 차원에서 마을 안 생태환경자원을 발굴하여 ‘숲 지도’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숲(자연)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료 피조물을 연결함으로써, 매주 드리는 예배와 교육, 봉사 활동은 물론, 전기와 가스, 물 사용이나 물건을 구매할 때 다른 선택을 고려하여 공존하는 삶을 살게 해줄 것이다.
셋째는 ‘실천’이다. 교육을 통해 행동할 신앙공동체를 세웠다면, 작더라도 실천프로젝트를 실행할 일이다. 교회가 온실가스 배출량과 배출원을 조사해 ‘온실가스 인벤토리(활동에 따른 탄소 배출 및 흡수량)’를 구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역사회가 탄소중립을 실질적으로 이뤄가게 하는 것은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교회도 탄소중립을 하려면,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 개인이나 기업, 국가 등의 다양한 활동이나 상품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총량)을 통해 에너지 소비습관을 점검하고, 모임 시 적절한 규모의 공간을 선택함으로써 전자기기 및 단열 등 에너지효율을 높여야 할 것이다. 탄소중립을 실질적으로 이루려면, 태양광을 통한 전기 생산은 필수이고 ‘지구 사랑 탄소제로’ 걷기 캠페인을 통해 걷는 만큼 선교비를 매칭하여 ‘환경살림 나눔발전소’를 세울 수도 있다.
교회 입구에는 자전거 거치대를 두어 세상과 교회를 연결하되, 가까운 버스나 지하철 안내판을 설치하여 대중교통 이용의 활성화를 꾀해도 좋다. 차 없는 주일을 정하여 지키되, 교통수단이 없는 노인 등 교통약자들을 잊어선 안 된다. 교회 안의 쓰레기를 살펴 낭비를 줄이거나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고, 지역주민과 연대하여 물건 공유나 재사용 문화를 확산하고, 재활용 가능 자원을 찾아 직접 그 순환을 돕는 ‘제로웨이스트 샵’을 운영할 수도 있다. 교회 정수기나 화장실 등에는 물 절약 및 텀블러 사용이나 손수건 사용을 권장하는 포스터를 붙여 환경의식을 높여도 좋다.
먹는 것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윤리적 식사로 하되, 지역에서 생산된 안전한 먹거리를 공정한 가격으로 구입해서 필요만큼 직접 차려 먹도록 권장하면 좋겠다. 교회숲밭(정원)을 만들어 공동으로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것은, 공동체 내 어려운 이웃에 대한 돌봄을 위해서도 의미가 크다. 필요하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농촌교회 생산물이나 공정무역 제품을 연결해 상생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좋다.
좀 더 힘을 낼 수 있다면, 지구 생태계 복원을 위한 실천 계획을 세워도 좋겠다. 교회 주변의 손상된 지역이 있다면 복원하는 활동을, 아직 손상되지 않은 곳이 있다면 보전 활동이나 토착생물들이 살 수 있도록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는 일을 계획해볼 수도 있다.
모두가 골고루 풍성한 삶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눅 17:21),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하셨다.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영성’ ‘교육’ ‘실천’(행동)의 길을 걷는 교회마다 창조세계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신음하는 피조물을 사랑하게 되길 소망한다. 창조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탄소제로 녹색교회’가 발하는 창조의 빛으로 인해 심히 아파하고 있는 지구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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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리뷰🖋]
'플립러닝 기초과정'을 마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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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호섭
농업기계의 기계화 연구를 통해
농업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예우림 교회 청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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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지인에게 과신대 기초과정을 권유받기 얼마 전까지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생각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성경 속에 여러 기적들이 기술되어 있지만 과학적인 상식을 벗어날 때마다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생각만 할 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예배 후 교제를 하는 중 어느 한 지체가 ‘성경만 봤을 때는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을 들었고, 과연 성경은 과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 강의 권유를 받았다. 때문에 강의 권유를 받을 때 호기심이 가득한 생각으로 강의를 들었다.
강의 내용의 첫 감상은 ‘신박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각 학문을 연관해서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여러 의문을 가지고 강의를 들었다. 타이틀에 맞게 창조과학의 중심으로 강의가 이어져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창조과학의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다 보니 다른 과학 상식으로 궁금했던 부분이 해소가 되지 않아 아쉽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첫 O.T.에 참석하지 못하여 강의에 대한 개요를 직접 듣지는 못하였지만, 이 또한 강의를 들으면서 찾아가는 재미라 생각하며 강의를 들었다.
O.T.를 못 가서 교재를 받지 못하여 pdf 파일로 전달받아서 좋았다. 강의에서 설명을 잘 해준다고 해도 동영상 강의만 들었을 때, 이해를 하기 힘든 부분이 여럿 있었다. 또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라인상에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여 게시하면, 댓글로 답을 달며 생각을 공유하기도 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오프라인 토의 시간은 좋았었다. 오프라인으로 토의하는 시간에도 생각하지 못한 논의 주제가 많이 나왔고,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기초과정에서 논의하기에는 깊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매주 과제는 이해하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강의를 여러 번 돌려보기도 했고, 문제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답을 찾는 것이 아닌 나의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가 많아 문제의 질문에 중점을 맞추려 노력했었다. 기초 과정을 이수한 후에도 결론은 [‘신학’과 ‘과학’은 따로 이해하고 공부해야 한다] 고 생각된다.
아직 과학이나 신학이나 많은 내용을 모르는 것도 있고, 과신대가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는 알겠지만 명확하게 정의를 하지 못하는 것도 결론을 추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생각한다. 신학은 성경을 토대로 세계를 넘어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고, 과학은 세계의 현상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어느정도의 교집합은 있을 수 있겠지만, 100% 공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과학을 통해 신앙을 알아가는 도구라는 것의 취지에서 받아들이기에 따라 과학이 신앙을 잃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속에서 성경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좋은 취지라 생각되며,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기 위한 각 학문의 지식을 꾸준히 습득하여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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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핫클립📺
『기후위기와 자유민주주의가 무슨 상관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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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이미 유행이 다 지나버렸지만 포켓몬 빵을 꾸준히 하나씩 섭취하고 있는, 과신대 제일의 포켓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행정팀장 박아론입니다. 얼마 전에 피카츄를 얻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꾸준함의 상징으로 포켓몬 스티커와 함께 배 둘레가 같이 성장하고 있는거 같아서 이제 포켓몬 마스터의 꿈을 접고 은퇴해야겠습니다.
최근 3/4분기 이사회를 진행했습니다. 사무국에서 여러 자료를 정리하고 종합해서 이사님들께 보고드렸습니다. 사무국에서 하는 일을 정리하면서 과신대가 이것저것 하는 일도 꽤 있지만 여러 영역에서 협력해 주시는 분들이 참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도 여기저기에서 도움의 손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과신대 사무국의 역량에 비해 과분한 참여와 관심, 헌신을 누리게 됩니다.
과신대는 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바라는 분들의 대화의 장소가 되고 싶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과 권위들에 ‘왜’라는 질문을 해보고 스스로 답을 구해 가는 과정에서 더 깊은 깨달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구도자(求道者)들이 연대할 수 있는 곳이 되고 싶습니다. 언제나 열린 공간으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일교차가 큰 10월 건강 조심하세요! 아 참, 11월에는 과신대에서 여러 행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과신대는 언제나 후원자님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집니다. 감사합니다.
박아론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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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소식 📧
1. 연구소 : 제5회 과신대 포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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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뮤니티
- 교사 모임 : 교사 모임은 10월 7일(토) 오후 7시 반,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현재 교회학교 교재 제작을 위해 애써주고 계신데요. 이번 모임에서는 생물 파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을 갖았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균형 잡힌 창조 신앙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 교사 모임 선생님들을 응원해 주세요.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교사 모임 참여에 관심 있는 선생님들께서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다음 모임은 11월 4일 (토) 오후 7시 반 입니다.
- 목회자 모임 : 10월 16일(월) 저녁 8시 줌에서 만납니다. 《영화로 보는 세상》 저자이신 김양현 목사님과 함께 영화 《오펜하이머》를 주제로 이야기 나눌 예정입니다. 《오펜하이머》를 인상 깊게 보셨다면, 교회에서 어떤 시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되신다면 목회자 모임으로 어서 오세요!
과신대 목회자 모임은 다양한 사역 현장의 경험을 나누고, 목회 현장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연대하고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 정회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참여 신청 : https://bit.ly/3szaY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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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은 정회원들이 직접 주관하고 참여하는 독서 모임입니다. 모임 참여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관악 북클럽
10월 23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더처치 비전센터 (쑥고개로 122)
분당판교 북클럽
《나는 무엇을 믿는가》 한스 퀑 저
10월 12일 목요일, 저녁 7시 성공회 분당교회
샤르댕 북클럽
"전지적 과신 시점" with 우종학 교수
10월 16일 월요일, 저녁 8시 / 온라인 z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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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신청 및 문의
#분당판교 정훈재 북클럽 지기 (hunjae@gmail.com)
#제주 김양현 북클럽 지기 (fisherkim30@gmail.com)
#샤르댕 박소은 북클럽 지기 (esthera@nate.com)
#성서와여성 김란희 북클럽 지기(urbanlite@naver.com)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scitheo.office@gmail.com / 010-2397-4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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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지적 과신시점> 샤르댕 북클럽 미니특강 with 우종학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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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북클럽'에서 준비한 <전지적 과신시점>이 10월 16(월)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과신대 대표이신 우종학 교수님과 함께 과학시대에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또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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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3년 9월 재정 보고
이번 달 재정은 수입 6,384,013원, 지출 7,672,592원입니다.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이번 달도 과신대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재정 보고는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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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과신대
과신대는 구독자 여러분의 기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채택된 분들께는 2만원 상당의
기프티콘이 제공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주제 : 자유기고 / 다음 호 주제 칼럼
분량 : 워드 or 한글 4매 이내
제출 : scitheoeditor@gmail.com
* 편집 사정에 따라 해당 기고문이 실리지 않거나
다음호에 기재 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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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 이달책
《적을수록 풍요롭다》
- 부제 : 책 내용은 별로 없는 실전 책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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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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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과신뷰가 기후위기와 관련된 주제로 나가는 만큼 저번달에는 편집장님이 「기후 위기 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고 이번에는 영상팀장을 맡고 계시는 이슬기 간사님이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셨다. 그렇다 이번에 소개할 그리고 이번 과신뷰의 제목이기도 한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이라는 책이다. 계속해서 읽을 책들을 추천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뭔가 교수님들께서 ‘어라? 이것도 읽어? 그러면 이건 어때?’라는 느낌이다. 물론 나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이긴 하지만 뭔가 퀘스트를 받는 느낌이랄까? 뭐 그래도 어떤가? 좋지 아니한가?
이번 책은 기독교적인 주제는 아니다. 기후위기에 관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사실 기후 위기라는 이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신앙인들이 무감각한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아무튼 긴긴 추석 연휴 동안 아주 여유롭게 읽으면 되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주문하려고 했으나 인간은 같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여유롭게 읽으려는 내 자신을 반성하고 추석때 실컷 놀고 10월 6일에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10월 9일에 쉬는 날이 있어서 열심히 읽었다(휴 큰일 날뻔했다).
아무튼 본격적인 책 내용에 앞서 저자인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을 찾아봤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국제 불평등연구소 방문 선임연구원이자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 환경과학기술연구소 교수라고 되어 있다. 이분이 어떤 공부를 해오셨는가 보니 글로벌 불평등, 정치경제학, 생태경제학 등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경제인류학자라고 한다.
‘경제인류학자’라니 뭔가 생소 학문 영역인듯싶다. 그래서 구글링을 통해 먼저 ‘경제인류학자’에 관한 위키 백과를 찾아봤다. 영어로는 Economic anthropology라고 하는데, 이는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있기보다는 ‘인류학’적인 관심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위키 설명에서도 경제적 행동에 관한 설명을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관심사에서 설명하는 경제학과 인류학의 융합이라고 설명한다.
정리하면 인류학적인 배경에서 경제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할 때 히켈의 글에서 ‘신화’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역사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일종의 ‘믿음’,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자, 여기에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나 김경식 님의 “영화 대 영화”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적절히 끊어보면서 해보려고 한다(물론 재미는 보장 못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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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한계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2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성장’과 ‘한계’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목적 없는 끊임없는 ‘성장’과 목적과 자연적인 결론에 따른 ‘한계’일 것이다. 먼저 ‘성장’에 관해서 살펴보자.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끝없는 성장을 정언명령으로 내세운다고 한다. 여기에서 정언명령이란 칸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선하므로 절대적이고 의무적으로 행할 것을 요구되는 도덕 법칙’이다.
자,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절대적인 의무이므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이상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더라도 ‘성장’을 다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반박 시 ‘코뮤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한다면 ‘왜 성장을 해야죠?’라고 묻는 순간 한국에서는 사상검증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목적이라는 가치를 후순위로 둔다고 할지라도 먼저 ‘무제한적인 성장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 봐야한다. 책에 따르면 ‘무제한적’인 성장 따위는 없다.
왜 그런가? 여기에서 자본주의 역사에 관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자본주의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약탈과 수탈,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자본주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서 초기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부유한 이들은 많은 공유지를 사유화 시키고,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자영농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시작했다. 첫 번째 외부적인 수탈이다.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됨에 따라 국내에서 값싼 노동력을 외부에서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 시대이다. 제국들, 여기에서는 대영제국은 남반구 국가를 아주 효율적으로 약탈했다. 거기에서 나오는 값싼 자재들과 노동력을 통해 한층 자본주의를 ‘성장’시켰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끝인가? 아니다 이제는 신자유주의가 남았다. 결국 외부에서의 공급이 없다면 자연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한계의 개념이 생겨난다. 좋다. 그렇게 외부에서 약탈과 착취 강탈을 통해서 성장을 계속해서 이루어낼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다. 지구에서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한다고 한들 그것을 자원을 더 빨리 더 많이 캘 뿐 결국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은 지구 외의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자연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를 끊임없이 착취하는 구조를 멈출 수가 없다. 한계 없는 성장,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장 그 자체가 목적인 자본주의 상황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 익숙한 색이 떠오르지 않나? 그렇다 빨간색이다. 공산주의를 생각하게 되지만, 공산주의와는 다른점은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포스트 자본주의의 상상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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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자본주의
여전히 시장과 자본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경제의 모습인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정보에 기반하여 상품을 선택 구입하는 것, 사람들이 노동력에 대해 공정하게 보상을 받는 것,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면서 동시에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경제, 혁신으로 생태적 압력을 줄이며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인간복지를 향상시키는 경제 말이다.
저자는 이 부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쉽다고 생각하면 순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합의를 통한 더 나은 삶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생각났다. 모두가 자신이 최소한의 권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존 롤스가 철저히 개인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았다면, 저자는 민주주의라는 집단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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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자, 나는 더 깔끔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글자 제한이 걸려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농담이다. 책의 주제 중에 2개에만 포커스를 맞춰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예시와 이야기들이 들어있으니 읽어보길 바란다. 아 책은 내용만 한 360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된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사상이 끝없는 성장을 부추겼다고 비판하는 것과 함께 애니미즘적인 사고를 통해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생태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 궁금하면 사서 읽어보도록 하자.
한 줄 평
"목적없는 성장 멈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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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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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34분께서 9월 한달 과신대를 재정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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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님과 소통하며 <과신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달의 과신뷰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과신대 편집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보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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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독자의 소리>
이번달 과신뷰 Feedback
익명 : 기후위기에 대해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이번호에서 주제로 다루게 되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지역에너지 전환 교회에 대해 엿볼수 있어서 좋았고 구체적인 실천지침도 있어서 좋았습니다. 잠깐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편집자에게 하고 싶으말
익명 : 육식을 하는것이 환경에 악영향을 줄수 있다는 것뿐만아니라 윤리적인 이유로 잘못될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논의가 앞으로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구독자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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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신학의대화 과신대 scitheo.office@gmail.com 서울시 종로3가 삼일대로 428 낙원악기상가 5층, NPOpia 50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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