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 과신뷰 이 달의 주제 : 제5회 포럼 특집호
자유의지와 뇌결정론
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과신뷰 vol.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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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장 : 김양현 │편집위원 : 박아론 이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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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이달 핫클립 《제5회 과신대 포럼 "자유의지와 뇌결정론" 스케치 영상》
- 주제 칼럼1 《신경과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가?》 (김성신)
- 주제 칼럼2 《결정론이 승리하는 날》 (김남호)
- 주제 칼럼3 《"자유", "체화된 인지", "창발"》 (정대경)
- 이달 영화 《크리에이터 The Creater》 (김양현)
- 포럼 리뷰 《철학과 신학, 과학의 공통 관심사이자 난제 '자유의지'》 (옥승헌)
- 사무국 소식 (박아론, 이슬기)
- 이달 책 《천개의 뇌》 (박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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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핫클립📺
제5회 과신대 포럼 "자유의지와 뇌결정론" 스케치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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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신경과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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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신경과학자들은 기억, 학습, 감각, 감정, 의사결정, 언어, 사회성 등 인간의 모든 인지기능을 뇌의 활동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정신현상을 대략 1.3kg 정도밖에 되지 않는 뇌의 전기화학적 신호의 처리과정으로 받아들인다. 100여 년 남짓 되는 짧은 현대 신경과학의 역사 중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비약적인 연구 성과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어왔다.
19세기 중반 폴 브로카, 칼 베르니케 박사의 환자연구를 통해서 좌측 전두엽의 특정 부분이 망가졌을 때 언어능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쇠막대기에 머리를 관통당하여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피니어스 게이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뇌의 손상이 인간의 성격과 인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세기 중반에는 양측 해마체가 제거된 환자 H.M. 으로 알려졌던 헨리 몰라이슨 (1926-2008)에 대한 연구를 통해 뇌의 특정 영역은 성격과 인격을 넘어서 인간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기억을 생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 발명된 자기공명영상 (MRI)를 통해서 살아있는 인간의 뇌의 구조와 활동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인간의 정신현상을 뇌의 활동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지신경과학의 패러다임이 확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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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카 환자의 손상된 뇌, 출처 : Nature Review Neuroscience(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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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이타심은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른쪽 두정엽 내 특정 영역 회백질의 부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 영역을 일부 제거하거나 전기적으로 자극한다면 이타심을 줄이거나 또는 늘리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낮은 싸이코패스 범죄자들의 행동은 앞서 언급한 피니어스 게이지 (1823-1860)의 예처럼 전두엽의 낮은 활성화도로 설명할 수 있다. 아동 성 착취물을 수집하고 성충동을 자제하기 힘들었던 사람의 전두엽에서 뇌종양이 발견이 되었고 이를 수술을 통해 제거한 후에 이러한 강박증이 사라졌으나 수술 이후 뇌종양이 조금씩 다시 생기면서 이러한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례도 유명 의학저널에 보고된 바 있다. 쥐를 이용한 최근의 연구들은 레이저를 이용하여 식욕을 조절하거나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을 조작하거나 기억을 삭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인류는 이제 과거처럼 조현병이나 자폐증을 귀신들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뇌의 비정상적 기능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고 현재 이러한 정신질환들의 신경과학적 기전도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시간과 공간, 물질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논의를 촉발한 것처럼 인지신경과학의 발전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지신경과학이 철학자들의 오랜 난제인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이는 인지신경과학의 핵심 가설인 모든 정신적인 현상은 뇌라는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맞는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단지 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중요한 실험으로 알려진 리벳 실험은 인간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의사결정을 인지하기 전 수백 밀리 초 전에 준비전위라고 하는 뇌파의 크기가 점진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버튼을 누리기로 결정한 이후에 뇌의 반응이 관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험 결과는 이러한 예측과는 반대였다. 비교적 최근인 2008년에 발표된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를 이용한 연구는 약간 더 복잡한 과제인 왼쪽과 오른쪽을 선택하는 과제를 사용하였는데 피험자가 판단을 인지하기 8 초 전의 뇌 활성화도의 패턴을 통해서 피험자의 판단을 유의미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리벳의 실험에서 나타난 준비전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결정적인 증거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2012년의 연구에서는 준비전위는 의사결정을 인지하기 전에 발생하는 무작위적인 신경활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신경활동의 크기가 특정한 문턱 값을 넘었을 때 이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리벳 실험과 fMRI 실험에서 사용한 비교적 단순한 과제를 수행할 때 준비전위가 발생하는 것은 의사결정 이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그 자체가 의사결정의 과정이며 이 크기가 문턱 값을 넘었을 때 의사결정의 결과로서 이를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의사결정 특히 단순한 의사결정 중 이미 습관화된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경두개자기자극이라는 비침습적 뇌자극을 통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내거나 반대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한 것처럼 인지하게 만들어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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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벳실험 방식 (출처 : https://brunch.co.kr/@ys1j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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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나 좌우를 선택하는 것보다 보다 복잡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의사결정의 경우는 어떨까? 예를 들어 치킨을 좋아하는 필자에게 양념치킨과 프라이드치킨을 선택하는 것은 반반 치킨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전까지 매우 어려운 의사결정 과제였다. 2019년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처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때는 리벳의 실험과는 달리 준비전위가 발생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무작위적인 신경활동으로는 신중한 의사결정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의사결정은 의사결정의 대상에 대한 가치를 표상하는 복내측전두엽과 기저핵, 그리고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을 처리하는 해마와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리벳의 실험이나 그 후에 이루어진 유사한 실험들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지금까지는 뇌의 활동이 우리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증거들을 소개하였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흥미로운 예로 달라이라마의 제안으로 위스콘신 대학에서 티벳의 수도승을 대상으로 2004년에 발표된 연구는 명상을 통해 높은 주파수 대역 (25~42 Hz)의 감마파의 크기를 일반인에 비해서 크게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뇌-기계 접속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의지로서 뇌 활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뇌-기계 접속은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듀크, 브라운, 캘리포니아 공대, 피츠버그대학 등에서 원숭이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기술의 핵심은 운동피질에 삽입된 전극을 통해 뇌-기계 접속의 사용자가 구체적인 움직임을 상상할 때 발생하는 신경신호를 기록하고 기계학습을 통해서 신경신호와 상상한 움직임 간의 관계를 학습한 뒤 이를 예측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상상만으로 신경신호를 조절하는 방법을 학습하면서 외부의 기계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뉴로피드백 역시 신경신호를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기술인데 뇌파 발생을 시각화하거나 이를 통해 비디오게임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해당 뇌파를 의지적으로 조절하는 방식을 훈련을 통해 배우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교육용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연구나 상업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신경활동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뇌-기계 접속이나 뉴로 피드백 기술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앞서 전자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가? 우리의 의지가 신경활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결과는 보다 근본적으로 정신이 물질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물음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신경활동을 조절하는 우리의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섣부르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으로 뇌의 A 영역의 신경활동을 조절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는 뇌의 B 영역의 신경활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A 영역과 B 영역의 신경세포 간의 연결인 시냅스는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인 근거가 된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의 인과관계가 아닌 뇌의 서로 다른 두 영역, 즉 물질 간의 인과적 상호작용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하향식 (top-down) 상호작용은 인지신경과학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이다. 주의 집중을 통해서 우리의 감각경험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예인데 유명한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젊은 여성을 보거나 나이 많은 여성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의 집중은 주로 뇌의 전두엽이나 두정엽의 신경활동에서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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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대 인지신경과학의 연구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지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인지신경과학의 가설처럼 뇌라는 물질에서 자유의지와 같은 정신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뇌가 아닌 다른 물질에서도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즉, 실리콘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비유기체인 컴퓨터, 구체적으로 ChatGPT 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은 자유의지를 소유할 수 있는가? 현재 ChatGPT 4.0 버전은 인간의 대화와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의 언어능력을 보유하여 튜링 테스트를 실제적으로 통과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더 나아가 감정과 욕구까지 표현하고 소유하기까지 한다면 어떤가? 최근 안토니오 다마지오와 같은 신경과학자는 인공지능이 적절한 몸을 가짐으로써 이를 보존하고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질 때 감정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을 추구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며 이는 결국 사용자의 욕구가 아닌 스스로의 욕구를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현대 인지신경과학과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은 자유의지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과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 몸의 2% 정도의 무게를 차지하는 작은 뇌라는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현재까지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명쾌한 증거와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사실 자유의지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답할 수 있는 것인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유의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크게 바꿀 것으로 기대되며 이에 따라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공동의 연구와 노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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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본성상 정복자이다. 우리의 DNA에, 정신에 그 본성이 깊이 새겨져 있다. 땅을 정복하기를 멈추지 않고, 이제는 지구 밖의 행성 개척까지 계획에 옮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그러나 역사는 우리의 성과만을 기록하고 있다.
땅의 정복은 곧 지식의 진보이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서 지식은 중요했고, 또 확장되었다. 적어도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부터 인간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현상 배후의 원인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수학과 과학 법칙이 발견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수학 공식으로 선정된 오일러의 항등식 Eiπ + 1 = 0을 보고 있으면 진리와 아름다움은 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복자에게도 시련은 있다. 길이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는 절망감에 빠지는 상황. 배가 좌초하고 승리의 욕구가 절망으로 바뀌는 암울한 상황. 지식의 난제 앞에서도 수많은 정복자는 길을 잃고 젊은 날의 총명함을 제물로 바쳤다.
자유의지도 그 난제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골드바흐 추측Goldbach's conjecture이나 리만 가설 Riemann Hypothesis과 같은 수학계의 난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선 자유의지는 일상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전문 철학자가 된 이유는 협박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조종 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행운과 우연도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의 이야기가 되느냐 아니냐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인류의 정복사에 뉴턴(Sir Isaac Newton)의 등장은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뉴턴의 공식은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 시간, 거리를 책상에 앉아서 예측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대인의 눈에 이는 거의 신에 맞먹는 능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도 우주의 수많은 물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움직임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기에 등장한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과제는 뉴턴 법칙으로 계산되는 자연 내에서 과연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발전한 뇌과학은 인간의 정신이 두뇌 과정에 의존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균 1.5kg 정도 되는 두뇌는 물질 덩어리이다. 따라서 물리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만들어 낸 정신 작용도 물리 법칙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즉,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결과물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바로 결정론Hard Determin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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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왼쪽)과 근대철학의 아버지 임마누엘 칸트(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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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결정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꽤 많다. 현대 생물학, 뇌과학의 발전은 유전자, 초기 형성된 두뇌 상태가 한 개인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심리학은 인간이 굉장히 기만당하기 쉽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험에 성공하였다. 플라시보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공포 마케팅 등이 그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결정론 지지자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허상이며, 그런 가능성은 단지 우리의 착각이라고 믿는다. 국내 독자에게 잘 알려진 샘 해리스는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그런 생각을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또한 유발 하라리 역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만일 결정론이 옳다는 게 밝혀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건 우리 문명에 ‘좋은 뉴스’일까? 아니면 ‘나쁜 뉴스’일까? 지지자들은 ‘좋은 뉴스’라고 볼 것이다. 그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고 말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헛된 꿈을 꾸기 때문이다. 왜 한국의 십대가 불행감을 많이 느끼는가? 자신은 천재도 아니고, 영재도 아닌데, 영재 교육을 시키고, 선행 학습을 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원하는 꿈을 어른이 방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줄 세우기 식 성적으로 남과 비교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결정론이 옳다면, 자신이 타고난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모두가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가, 손흥민 같은 스포츠 스타가, 조성진 같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한 건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에 알맞은 삶의 형태를 찾아 살면 오히려 자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론이 옳다고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분명 유전자는 한 개인의 신체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환경이라는 요소, 더 나아가 문화라는 요소도 있다. 그리고 환경이나 문화의 요소가 정확히 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개인 간의 편차를 고려하면, 그걸 일반화시킬 수 있을지 조자 의문스럽다.
심리학의 실험처럼 인간은 기만당하기 쉽다. 그러나 그로부터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도출될 수 없다. 이는 분명 논리적 비약이다.
현대 뇌과학은 컴퓨터 공학과 뇌 측정 장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역사가 아직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 두뇌 안에는 약 900억 개의 신경세포와 100조개 정도의 시냅스가 있다. 그 자체로 복잡계를 형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경세포 안의 미세소관은 그 크기가 거시계도 미시계도 아닌 중시계(Mesoscopic Structure)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중시계에도 양자현상이 발생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그 말은 기이한 양자현상이 인간의 두뇌 안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 두뇌는 결코 결정론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숙고할 때, 두뇌 안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더 알아내야 한다. 숙고 과정이 인과적인 사슬을 깨고 다른 결과 값을 도출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에 개입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결정론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결정론의 승리를 자축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기이한 일이다. 정복자가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 다름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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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자유", "체화된 인지", 그리고 "창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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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열며
이번 5회 과신대 포럼은 자유의지와 뇌결정론에 대한 신경과학적, 철학적 입장의 강연을 듣고, 대담으로 이어지는 순서에서 앞선 강연들을 통해 제기되는 질문들을 다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신경생리적인 과정에 수반하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신학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등도 다뤄보았습니다. 각각의 강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유”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지행위”에 관한 과학적 이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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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체적으로, 김남호 교수님은 자유론에 입각한 관점에서 인간의지의 자유를 특정한 상황에서 외부적 요인의 강요나 결정 없이 A와 B 중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으로 제시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저는 신학적 이해 안에서의 자유는 달리 이해되거나 제시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었습니다: “만약 어떤 인격적 존재가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없다면, 다시 말해, 만약 그 존재가 A를 선택할 가능성 밖에 없으나, 열렬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A를 선택하는 쪽으로 의지력을 발휘한다면 그 존재에게 자유는 없는 것인가?”
이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에게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 이해는 앞서 제시되었던 철학적 자유론의 맥락에서의 자유 이해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학사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등으로 손꼽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신학 논쟁들은 구원의 실현과 선을 행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유의지가 얼마나 작용하며,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 여부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논쟁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이 칼럼의 취지를 벗어나기 때문에, 혹 관심 있는 분들은 해당 논쟁들이 잘 정리된 신학 텍스트나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해당 논쟁들로부터 정립된 한 가지 신학적 이해 정도만 짚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인간의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신학적 자유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 밖의 의견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향해 경도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던 반면, 기독교 전통의 이론적 틀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로 인한 타락에 의해 인간의 의지는 항상 악을 향해 경도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peccare)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총에 기반한 자유는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해 악을 행할 수 없는(non posse peccare)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데, 인간의 종말론적 자유 실현은 본성적으로 악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적 차원에서의 자유는 하나님을 인간 자유의 원초적인 근원으로 상정합니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관한 담론에 있어 저명한 철학자 로버트 케인은 자유를 유전이나 환경, 신이나 운명 등의 기타 원인 없이 행위자 자신의 의지만이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맥락의 철학적 자유 이해는 신학적 자유 이해와 다소 구분되어 보입니다.1)
1) Robert Kane, The Significance of Free Will, 1996. 물론 현대 신학적 차원에서 위르겐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케노시스 개념을 가지고 논의하거나, 과정신학자들이 담지하고 있는 신적인 힘과 인간의 자유 개념 등을 가지고 본다면 케인의 자유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신학적 자유 이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굳이 구분을 해보자면,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론은 현대신학적 입장에서의 케노시스 바탕의 자유 혹은 피조물적 행위자성 이해와 상응할 수 있으며, 철학적 입장에서의 양립론은 전통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 혹은 행위자성 이해와 잇대어 구분하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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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각각 시조격인 두 인물. 칼빈(좌), 아르미니우스(우)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 교리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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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경과학적 논의에서 김성신 교수님은 인간의 정신적 속성들(e.g., 기억, 의지적 선택)은 신경생리적 과정에 기반하면서도 그 과정으로 단순 환원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인데, 왜냐하면,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왔던 신체를 떠날 수 있는 영혼 개념이 실상 지지될 수 없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김성신 교수님께서 시간 관계상 강연에서 깊이 다루지 못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뚜라나 등이 제안한 것입니다. 이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행위는 신체에 상당 부분 의존합니다. 그렇다 보니 인간의 인지행위를 체화된 인지라고 부르며,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체화된 주체(embodied subject)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과 인지 행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신체에 일차적으로 귀속되어 있으며, 그녀가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몸담아온 그녀의 환경,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어느 정도 귀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특정한 시점 t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데 작용하는 우리의 성향, 습관, 성품 등은 진공상태의 우리 영혼의 결정이 아닌 우리 신체에 각인되어 온 신경학적인 패턴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다는 말은 해당 시점에서의 우리의 선택이 오롯이 우리의 과거 행위들과 우리의 신체에 의해서만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정신과 신체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은 우리가 읽고 해석해온 성서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 같은 경우는 마치 우리가 죽는 즉시 우리의 영혼이 빠져나와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어떤 공간으로 이동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인간의 정신을 주로 표현해 온 신약성경의 헬라어 프쉬케는 신체를 떠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 신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어떤 측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일례로, 신약학자 H. D. 맥도널드는 이 프쉬케가 “인간, 사람, 마음, 진심” 등으로 번역되어 왔으며, 이는 한 사람의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핵심원리 혹은 특별한 정신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신체성과 유기적 연관성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합니다.2)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신경과학이 밝혀주는 체화된 주체로서의 인간 이해를 성서적 인간 이해와 상응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우리의 정신 혹은 영혼 개념 등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 H. D. McDonald, The Christian View of Man,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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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좌)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니(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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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교수님의 강연을 통해 상정된 개념 혹은 문제 가운데 우리가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발” 개념입니다. 창발 혹은 수반 등으로 명명된 이 현상은 자연계 내 상위속성이 하위속성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하위속성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주로 화학적 속성, 생물학적 속성, 정신적-문화적 속성 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물 분자들이 군집을 이루게 되면 이들은 물 분자의 구성 요소들인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들이 분리되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속성, 곧 무엇인가를 젖게 하는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속성은 화학적 창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생물학적 속성은 자기보존과 자기복제 정도로 들 수 있겠습니다.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 단위는 세포인데, 이는 세포를 구성하는 핵산이나 아미노산, 단백질 등이 분리되어 존재할 때는 보여주지 않던 현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포의 자기보존 과정(혹은 행위)이나 자기복제 과정이겠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분명 그것들을 구성하는 구성물질들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으나, 그 구성물질들이 분리되어 각각 존재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특정한 구조나 패턴을 이룬 채 존재하게 되면 나타나는 속성과 현상인 것이지요.
인간의 정신도 이러한 창발 현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두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과 시냅스 연결, 그리고 이 사이를 오고 가는 전기신호와 화학물질들은 그것 자체로 떼어놓고 보면 정신적 속성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집합적으로 일련의 구조와 패턴을 가지게 되면 그로부터 인간의 정신 현상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창발 혹은 수반 현상을 주제로 우리는 대담 순서에서 재미있는 논의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다음번 포럼이나 콜로퀴움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다룰 수 있다면 영미권에서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참여해 왔던 낸시 머피(Nancey Murphy),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아써 피콕(Arthur Peacocke) 등의 학자들이 논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 포럼에서 다뤘던 자유의지와 인간 정신의 문제를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룰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창발 문제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의 섭리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맞닿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과신대가 다뤄야 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다음 포럼이나 콜로퀴움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오늘 나눴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깊이 있게 진전시켜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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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영화🖋]
'크리에이터 The Crea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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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양현
더불어행복한교회 협력 목사 과신대 제주 북클럽지기, 과신뷰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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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2023.10.03./ 장르 SF/액션/국가 미국/등급 12세이상관람가/러닝타임 133분
감독 : 가렛 에드워즈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죠수아), 젬마 찬(마야), 와타나베 켄(하룬), 매들린 유나 보일스(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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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 미국 LA에 핵폭탄이 터졌다.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국방부는 인공지능 로봇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 무엇보다 인공지능 로봇의 설계자인 니르마타를 찾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 특별 임무에 죠수아 병장이 투입된다. 죠수아는 니르마타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마을에 잠입하고 거기에서 마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특수 부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야는 생명을 잃는다.
실의에 빠져 있는 죠수아에게 앤드류 대령이 찾아오고 마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야는 니르마타의 측근이며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가공할 무기인 A. I.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전한다. 마야를 살리고 싶다면 니르마타를 제거하고 그들이 개발 중인 로봇도 제거하라는 명령을 죠수아는 받아들인다. 죠수아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본거지로 침투하고 거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듣게 된다.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무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로봇 알피였고, 니르마타가 설계한 로봇 알피는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것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상징이었다.
가렛 에드워즈의 신작 크리에이터의 내용이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크리에이터는 올해의 화두였던 챗 GPT의 연계선상에 있다. 세계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발달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에 온통 관심이 쏟아진다. 일찍이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던졌던 스카이 넷의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이 영화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한 형태,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멀잖아 우리 삶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로봇은 인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그들은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우선 영화에서 앤드류 대령들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장차 인류를 멸망시킬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 이런 설정을 할까? 일찍이 칼 세이건은 자신의 책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이 그랬고, 코르테스와 아즈텍이 그랬다.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성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칼 세이건의 우려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상의 적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눈에 낯선 존재들은 잠재적 적으로 규정된다. 비단 외계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제3세계의 사람들을 잠재적 적, 잠재적 악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과도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M.D. 전략의 그중 하나이지 않은가? 여전히 흑인들이나 동양인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앤드류 대령과 특수부대원들은 로봇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악의 씨앗 자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죠수아 병장은 중립지대에 있다. 그는 앤듀류 대령의 명령을 따라 혹 그 생각을 따라 로봇들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로봇들과의 조우,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에 전환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 가공할 무기라 여겼던 로봇 알피와의 조우는 죠수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알피는 평화의 상징이었고, 알피는 모든 적대적 생각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로봇이었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죠수아 병장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접촉이 필요하다. 다른 문명 혹 타인에 대한 대부분의 적대적 생각은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우려에서 비롯된다. 만나보면 달라질 수 있다. 가다머의 주장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선이해구조를 가진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다머는 지평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평융합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슬람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인 ‘인샬라’( In Sha Alla)처럼,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내가 긍정으로 여기면 상대는 긍정으로 다가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로봇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아닌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인가? 혹 호모 마키나인가?
신학자 페트릭 세리는 위고의 말의 빌려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즉각적 창조물이고, 예술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창조하시는 일이다.” 부언하면 자연은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이라면 예술 혹 기술은 인간을 통한 간접 창조물인 셈이다.
또한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진정한 시인은 자기가 아니고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엔토우시아모스’라고 한다. ‘엔 en’은 영어 ‘인 in’, ‘토우 thou’는 ‘테오스 theos’에서 유래했으므로 ‘신 god’이다. 시인이 시를 창조할 때는 ‘신 안의 존재 das – In – dem – Gott – Sein’다.”
이렇게 볼 때 로봇은 신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신의 2차 창조물이자 간접 창조물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신의 창조 자체는 선하므로 신의 2차 창조물인 로봇도 선하다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 아닐까?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알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알피를 이용해 오히려 세계를 통합하려는 앤드류 대령이 문제 아닐까?
또한 우리는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 로봇에게 영혼이 존재할까? 물론 현대의 뇌과학의 담론은 인간에게조차 영혼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뉴런의 현상일 뿐 정신이나 영혼도 화학 작용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 전통,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는 전통에 의하면 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재료를 창조하셔서 그 재료가 물질을 형성하게 하신다. “신이 처음 원질료(재료)를 창조했다. 그러한 질료로부터 갖가지 힘에 의해 물(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과 신에 의해 창조된 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창조와 형성의 기본적인 구별이 행해진다. 다시 말해, ‘밖에 드러나는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여기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질료 materia와 형상 forma 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따르면 인공지능 로봇, 크리에이터에서의 알피는 질료와 형상을 가진 셈이다. 신의 일차적 창조와 이차적 창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부모를 매개로 태어날 때 신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신학은 가르친다. 이런 신학 전통에서 볼 때 실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정신 활동을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로봇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알피의 창조자 니르마타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우리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에 지나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속하기에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로봇은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인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기억하자. 오직 인간만이 영혼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하기에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창조하신 사물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타락한 죄성은 창조세계와 창조물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변질 시킬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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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리뷰🖋]
철학과 신학, 과학의 공통 관심사이자 난제 '자유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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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옥승헌
감리신학대학교 종교철학전공 4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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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로운가?” 이 질문은 희대의 난제이다. 2,000년 넘도록 많은 천재들이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문제이다. 철학에서 질문하듯 “의지는 아낭케(ananke: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에 종속된 것인가?, 또한 세계는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가?” 신학에서 질문하듯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건을 규제하는가? 또는 영혼이 자유롭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의지가 모종의 필연성에 종속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로 규제되어 있다면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을까? 법을 위반한 사람의 뇌가 안와전두엽과 복내측전전두엽 부위의 장애에 의한 것이라면 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사회로부터의 격리이지 않을까? 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라면 그를 정죄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자유의지’라는 주제는 철학과 신학, 과학의 공통적인 관심사이자 난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신학자)이면서 과학적 세계관에 사는 사람이라면, 또는 과학자이면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과학과 신학, 때로는 철학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자에게 과학과의 대화는 자유의지에 대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기회이고 과학자에게 기독교인과의 대화는 신학적 상상력을 제공받을 수 있는 기회이며 과학자 및 신학자에게 철학과의 대화는 정교한 개념 분석과 논리적 논증 방법론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1월 1일 수요일, <자유의지와 뇌 결정론>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5회 과신대 포럼은 유의미한 시도라고 판단된다. 김성신 교수님(한양대 데이터사이언스 심리뇌과학)은 “뇌결정론에 대한 신경과학자의 관점”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뇌과학 발전의 역사와 그에 따른 성과를 짚고 뇌 과학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김남호 교수님(울산대학교 철학상담학과)은 자유의지라는 주제는 과학의 독점적 과제가 아님을 지적하면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결정론자들과 자유론자들의 논쟁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김성신 교수님이 신경과학자의 관점에서 자유의지 논의에 접근하였다면 김남호 교수님은 철학자의 관점에서 해당 논의에 접근하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강연 후에는 정대경 교수님(숭실대학교 교목실)의 진행으로 대담 및 질의응답 시간이 마련되었다.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가 한자리에 앉은 이때에는 보다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예컨대 “의지의 자유를 더 세분화해서 볼 수는 없을까?”, “신경과학이 감정반응을 조절할 수 있다면 영성 훈련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아메카(Ameca)와 같은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 형태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몸을 떠난 의식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등의 문제들이 펼쳐졌다.
다소 난해한 내용이라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였지만 쉬운 설명 덕에 이해하기 수월했고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은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교수님들의 강연도 훌륭했지만 특히 2부 대담 및 질의응답 시간은 보다 깊은 논의를 들을 수 있었기에 인상 깊었다. 바라기는 앞으로도 과신대에서 <자유의지와 뇌 결정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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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과신대 사무국을 잘 지키고 있는 행정팀장 박아론입니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모를 날씨가 지속되다가 잠깐의 가을이 지나가고 곧바로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언제나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무국에서는 큰 행사를 치르고 나서 잠깐 정비를 한거 같습니다. 사무처리라는 게 참 별거 아닌 거 같으면서도 뭔가를 계속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물리학자로 유명한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책에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무질서해지는(?) 사무일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도 사무국 열심히 생명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11월 한 달 한 편으로는 과신대와 협력해 주실 교회들을 찾고, 회원의 밤과 같은 연말 행사와 23년 연간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짧은 아직 1년을 다 못 채웠지만 뭔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오자 과신대 사역에 그래도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도 좀 느껴지고요. 무엇보다 실력을 많이 키워야겠다는 생각 듭니다. 아무튼, 제게 맡겨진 시간 동안에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아론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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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소식 📧
1. 연구소 : 제5회 과신대 포럼
지난 11월 1일 수요일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된 제5회 포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준비 기간 중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과신대에 들어오고 나서 두 번째로 진행한 포럼이어서 많이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현장에 가서 보입니다. 예전 군대에 있을때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말이 ‘현장에 답이 있다’, ‘현장에 가서 계획을 세워라’라는 말이었는데, 좀더 치밀하게, 세밀하게 둘러봐야겠습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가는지요. 대중 포럼이라는 것이 전문적인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듣고 질문할 시간이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게 얼마나 야속한지요. 포럼이 끝난 뒤에도 교수님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포럼 시간이 좀 더 넉넉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가득했었습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했는데 그만큼 배움에 열정이 있으신 분들이 많구나, 포럼 하길 잘했다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수요가 있으니 과신대도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강연과 대담을 맡아주신 김남호, 김성신 교수님 그리고 정대경 교수님까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포럼 준비와 실행에 도움을 주신 이사님들 감사합니다. 특별히 바쁜 와중에도 도움을 준 과신대 서포터즈들도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년 포럼으로 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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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뮤니티
- 교사 모임 : 교사 정기 모임은 11월 18일(토) 오후 7시 반, 줌으로 만납니다. 다음 세대에게 균형 잡힌 창조 신앙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 교사 모임 선생님들을 응원해 주세요.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교사 모임 참여에 관심 있는 선생님들께서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 목회자 모임 : 목회자 모임은 지난 11월 13일 월요일 저녁, 《창조의 신학》 저자이신 박영식 교수님과 함께 진화에 직면한 창조 신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시간의 대화로 못내 아쉬워 내년 초에 다시 한번 모시고 싶다는 요청이 있을 정도로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이번 달부터 목회자 모임은 정회원이 아니어도 과학과 신학에 대해 함께 대화 나누기 원하는 목회자 누구나 환영합니다. 다양한 사역 현장의 경험을 나누고, 목회 현장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연대하고 공부하는 목회자 모임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참여 신청 : https://bit.ly/3szaY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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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은 정회원들이 직접 주관하고 참여하는 독서 모임입니다. 모임 참여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샤르댕 북클럽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홍성욱 저
11월 16일 목요일, 저녁 8시 / 온라인 zoom
분당판교 북클럽
《나는 무엇을 믿는가》 한스 큉 저
11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 성공회 분당교회
관악 북클럽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저
11월 20일 월요일, 저녁 7시 반/ 더처치 비전센터
✨참여 신청 : https://forms.gle/GC2tbszErKVfd22a9
제주 북클럽
《하늘과 바람과 별과》 김상욱 저
11월 26일 주일, 오후 5시 / 제주 북촌교회
성서와여성 북클럽
《예수의 어려운 말들》 에이미질 레빈 저
11월 28일 화요일, 오후 7시 / 온라인 z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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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신청 및 문의
분당판교_정훈재 북클럽 지기 (hunjae@gmail.com)
제주_김양현 북클럽 지기 (fisherkim30@gmail.com)
샤르댕_박소은 북클럽 지기 (esthera@nate.com)
성서와여성_김란희 북클럽 지기(urbanlite@naver.com)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scitheo.office@gmail.com / 010-2397-4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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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원의 밤
과신대에서 연말을 맞이해 '회원의 밤' 행사를 진행합니다. 참여 자격은 과신대 정회원(및 자문위원)만 참여가 가능합니다. 자세한 안내는 추후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과신대 회원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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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3년 10월 재정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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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 이달책
《천개의 뇌》
- 부제 : 책 내용은 별로 없는 실전 책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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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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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번 달 과신대 제5회 포럼인 ‘자유의지와 뇌결정론’에 발맞춰, 소개할 책은 바로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핫한 책 중에 하나라는 《천 개의 뇌》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접한건 책이 아니라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에서이다. 특별히 해당 유튜브 채널에서 이 책을 직접 번역하신 분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시는데 몹시 흥미를 끌었지만 당시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읽지 않다가 이번 포럼을 맞이해서 읽게 되었다. 혹시나 책 읽을 시간이 없거나 글을 읽기 귀찮다면, 혹은 짧게라도 어떤 내용이 대강 있는지 알고 싶다면 안될과학을 추천한다. 물론, 다 소개하지는 않고 첫 번째 챕터만 소개한다(링크1, 링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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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먼저 책에 들어가기 앞서서 저자 소개를 해볼까 한다. 결국 책은 어떤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썼는지를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맥락 없이 뚝 떨어진 책은 한권도 없으니까. 책의 저자인 제프 호킨스(Jeff Hawkins)는 신경과학자이자 컴퓨터 공학자이다.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신 분인데 인공지능을 연구하기 위해서 신경뇌과학을 시작하신 케이스다. 제프 호킨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지능을 닮은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의 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뇌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학습을 하는지를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뇌과학을 연구했다고 한다. ‘뇌의 지능’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제대로된 지능이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딱 봐도 원대한 꿈이지 않는가? 그래서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주제가 너무 넓다고 줄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 양반의 대단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원에서 주제가 넓다고 연구를 안 시켜줘? 그러면 내가 연구소 만들어서 연구해보지!’라는 생각을 가지 누멘타(Numenta)와 레드우드신경과학연구소(Rewood Neuroscience Institute)를 설립했다. 자 여기까지만 봐도 얼마나 이 사람이 뇌과학 연구에 진심인지를 느낄 수 있지만 이 형님의 능력은 여기에서 한발 더 앞선다. 기초과학 연구일수록 소위 돈 잡아먹는 하마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돈이 어마 무지하게 든다. 그러면 이 형님은 어떤 돈으로 연구를 어떻게 하시느냐? 직접 번다. 컴퓨터과학자이신 이분은 모바일 컴퓨팅 분야의 선두주자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제품을 발명한 공로로 미 국립 기술 아카데미 위원으로 선출되기 한 경력 있을 만큼 상업적인 재능도 있는 것 같다. 제프 호킨스는 스스로를 이론과학자라고 말하지만 다재다능하신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분이다.
그럼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크게 세 챕터로 구분이 된다. 첫 번째 챕터는 <뇌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크게 현재까지의 뇌의 학습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고 자신이 어떤 식으로 책 제목과 같이 ‘천 개의 뇌’이론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기계 지능>이다. AI 연구와 실제로 기계가 지능을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 논한다. 사실 이 부분이 제프 호킨스가 뇌 연구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반은 ‘지능’이 있는 기계를 만들고 싶어서 뇌의 근본 원리를 연구하고 있으니 지능 기계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볼 수 있다. 마지막 챕터는 <인간 지능>이다. 사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굳이 있어야 되나 생각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지능에 관한 부분이라기보다는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요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식상한 내용이기도 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책을 읽어보시고, 1, 2 챕터의 핵심적인 내용을 짧게 소개해 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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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
인간의 뇌는 크게 오래된 뇌와 새로운 뇌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특별히 인간의 지능은 새로운 뇌인 신피질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신피질에서 특별한 학습이 일어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가정이 있다.
1) 모든 신피질 기둥은 하나의 단위로서 모형틀을 가지고 있다.
2) 사물에 대한 인식은 신피질 기둥들의 ‘합의’ 따라 완성된다.
첫 번째 가정에서 ‘기둥’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한데 일반적인 뇌과학 서적을 보면 뇌를 부위별로 영역별로 기능을 달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제프 호킨스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데, 신피질을 각각 독립적인 학습틀을 익히는 길다란 기둥 묘사한다. 이러한 기둥이 신피질 전체에 약 10~15만 개 정도 있다고 본다. 더 중요한 점은 이 ‘기둥’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브로카 영역에 속하는 신피질 기둥들은 제각기 다른 기능들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고 다만 학습하는 각기 다른 ‘모형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정은 이 ‘모형틀’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전통적인 뇌과학에서는 각기 인지한 정보를 뇌의 어떤 한 지점에서 종합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위계로 정보가 종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프 호킨스는 이것이 ‘투표’로 진행된다고 한다. 이 투표라는 표현이 재미있는데, 예를 들면 후각 모형틀을 가진 신피질들이 느낀 감각, 촉각 모형틀을 가진 신피질들이 느낀 감각, 시각 모형틀을 가진 신피질들이 모여 투표를 해 각 기둥의 모형틀을 겹치고 겹쳐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학습은 한 대상의 여러 정보를 각 신피질 기둥들이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벌써 흥미로운데 이러한 학습 모형틀이 추상적인 사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논리적인 추측에 그친다. 그래도 제프 호킨스는 ‘기둥’모형과 이 ‘모형틀 학습’이론이 뇌의 지능 대부분을 설명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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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지능
기계 지능에서 제프 호킨스는 기본적으로 기술 낙관론자의 입장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지능을 정의하는 방식이 중요한대, ‘지능’이란 외부 세계에 관해서 능동적으로 학습을 할 수 있고 반응에 따라 학습 모형이 바뀌고 계속해서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얻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나온 AI 지능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능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빠른 연산과 아무리 그럴듯한 모형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그 ‘분야’에서만 연산이 빠를 뿐 다른 외부 세계의 모형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가장 각광을 받는 Chat GPT의 경우도 ‘딥러닝’ 방식을 쓰고 광대한 지식과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범용 학습을 못한다.
이 부분에서 제프 호킨스의 설명이 좀 재미있었다. 요약하면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이다.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AI 산업에 있었던 봄과 겨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특별히 산출이 빠르고 학습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틀리더라도 ‘유연성’이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지능이라고 부르기 위한 요건들을 제시한다. 첫째 끊임없는 학습 능력, 둘째 움직임을 통한 학습 셋째 많은 모형 넷째 기준틀을 사용한 지식 저장. 그런데 여기에서 다 설명하면 재미없으니 책을 읽어보자.
마지막으로 기계 지능에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지능’과 인격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부분이다. 물론 제프 호킨스는 인격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우리와 유사한 지능을 갖게 되면 곧 그것이 인격체의 등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지능을 감정과 분리하고 지능을 가졌다고해서 우리와 동일한 인격인 것은 아니기에 지능을 가졌다고해서 전원을 못 끌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와 ‘동기’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 기계가 목표나 동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능을 세밀한 지도라고 했을 때 지도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는 지도가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계 지능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를 정하지 못하니 별 상관없다는 것이다. 목표와 동기는 지능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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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책을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던 점은 여러가지 질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뇌가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로의 자극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 ‘모형틀’을 만드는데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등 감각기관이 부족한 경우에는 우리의 모형틀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유의지와 같은 추상적인 사고를 익히려면 얼마나 많은 모형틀과 모형틀의 연결이 필요하게 될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동의한 생각은 인공지능의 발달이 곧바로 인격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AI,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학습을 하고 학습을 효율적으로 높인다 할지라도 이 AI가 왜 이것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배울것 인지를 스스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연관성 내에서 연쇄적인 학습은 일어날 수 있을지라도 이는 결국 인간이 설정한 프로그램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다.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는 와중에서도 내 뇌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배움의 동물, 배움의 욕구는 무엇으로부터 유래되는가? 진화심리학자들은 그것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생존에 도움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왜 생존 해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고 있는 생존 기계를 본적이 있는가?
이번 포럼에서 자유의지와 뇌결정론에서 김성신 교수님이 대담 때 이야기했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자유의지는 욕망하는 존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몸으로 구분된 우리는 나와 구분된 세계에서 생존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해서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욕망이 지능을 발달하게 하고 근본적인 자유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욕망은 오래된 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진화사적으로 지성체를 만들게 된 근본 원리라 본다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지능’적일지를 만드는 게 위협적인 게 아니라 얼마나 우리 인간과 동일한 욕망을 품는 존재를 만드는 것이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지성체의 근본적인 조건이 아닐까 뇌피셜로 생각해 본다.
한 줄 평
"나는 나의 뇌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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