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 과신뷰 이 달의 주제
교회와 과학
과학과 신앙에 대한 다양한 시선 과신뷰 vol.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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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장 : 김양현│편집위원 : 박아론 이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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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2023 과신대 회원의 밤 🥳
- 《교회학교 교사가 창세기를 가르치면서도 현대 과학을 배워야 할까?》 오세조
- 《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장재호
- 편집팀 이야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양현, 박아론, 이슬기
- 사무국 소식 📬
- 이달 책 《생물학자의 신앙고백》 📖 박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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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과신대 회원의 밤에 정회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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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며 과신대에서 '회원의 밤' 행사를 진행합니다. 올 한 해 어떤 사역들을 해왔는지, 내년에는 어떤 활동으로 과신대 사역을 펼쳐볼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회원의 밤을 통해 2023년 과신대가 걸어온 길을 함께 돌아보고 균형 있는 창조신앙을 세우기 위해 애쓴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회원 및 자문 위원 여러분께서는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 일시 : 12월 19일(화) 오후 7:30 *입장 및 식사 교제는 오후 7:00부터 가능합니다
🔸 장소 : 연동교회 가나의집 4층
🔸 내용 : 2023년 사역 보고 및 나눔, 푸짐한 행운권 이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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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교회학교 교사가 창세기를 가르치면서도 현대 과학을 배워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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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교육은 영어로는 education인데, 어원적으로 라틴어 ‘e’(밖으로)와 ‘ducare’(끄집어내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교육’이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한 사람이 지닌 잠재 가능성이 발현되거나 발달하게 하는 것이 곧 교육인 셈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힘으로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스스로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자신 안에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교육환경을 먼저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히 기다려 주는 시간, 즉 ‘인내'가 교육에서는 필수적이다. 더불어 교육은 한 개인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개인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바람직한 한 인간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한편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류 역사의 새 창조를 위한 역동적인 에너지를 제공해 왔다. 즉 인간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기독교 교육이 있었으며, 기독교 교육이 수행되는 곳에서 기독교 신앙이 존속할 수 있었다. 즉 기독교 교육이 없이는 기독교와 그 본질인 기독교 신앙은 상상할 수 없었다.1)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교회학교는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현대 과학이 매우 발전하면서, 공교육에서 통합과학을 배운 학생은 교회학교에서 배우는 성경의 내용, 특별히 창세기의 내용이 학교에서 배운 과학의 내용과 매우 다름을 알고 이에 대해 목회자나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물어보지만, 과학의 내용을 정작 잘 모르는 목회자와 교회학교 교사들의 대답은 이들이 겪는 괴리감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특별히 지금은 약간 주춤하지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53~ )로 대표되는 ‘새로운 무신론자’2)들의 책을 읽은 학생은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져, 이들의 책을 읽은 후로는 아무런 비판 없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즉 교회를 떠난다. 그러면 공교육에서 과학을 배운 후에 드는 신앙적 의문과 괴리감이 가득한 채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학생을 위해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할까?
1) 루이스 조셉 셰릴, 『기독교 교육의 발생』, 이숙종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8.
2) 전통적인 철학적 무신론자와는 달리 과학의 결과를 무신론의 증거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들을 ‘과학적 무신론’이라고도 하며, 도킨스 이에도 샘 해리스, 데니얼 데닛 등이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신 없는 사람들』, 이철민 옮김 (서울: IVP, 2012)를 참고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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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는 창세기를 왜 여전히 가르쳐야 할까?
세속화와 더불어 현대 과학이 매우 발달하면서 많은 전문가는 구약성경 중 창세기는 소멸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과학의 발견과 매우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는 더 이상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견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예견과는 달리, 창세기의 영향력은 교회뿐만 아니라, 21세기 현대를 사는 인간의 삶에서 그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하다.3)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는 분명 생명체는 아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우리 인간 역사를 통해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UC 버클리대학의 근동학과 유대학 교수인 로널드 헨델(Ronald Hendel, 1950~ )은 그의 책 『창세기와 만나다』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biography)가 가능하다면, 창세기의 전기(biography)도 가능하다고 우선 전제한다. 그러면서 그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생각을 빌려, 창세기의 생애를 ‘본문의 생애’와 ‘사후의 생애’ 즉 두 부분으로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4) 그리고 이 구분에 따르면 창세기는 고대 히브리 단어, 문장, 이야기에 담긴 ‘있는 그대로 이야기’가 먼저 있을 것이다. 바로 창세기 ‘본문의 생애’이다.5)
3) 에밀리 디킨스, 프란츠 카프카 등 현대의 많은 작가는 창세기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4) 로널드 헨델, 『창세기와 만나다』, 박영희 옮김 (서울: 비아, 2020), 16-18.
5) 창세기가 쓰여지고, 편집되고, 형성되는 전체 과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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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창세기가 책으로 완성되어 인간에게 주어지고 후대에 전달되면서 후대 사람들은 창세기를 해석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해석은 1) 자신들의 시대에 맞춰 창세기의 내용을 재구성함으로서 창세기 본래 이야기가 지닌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2) 창세기의 본래 이야기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날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라면, 창세기의 ‘사후의 생애’가 형성된 것인데,6)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사후의 생애에서 원래 본문의 생애에는 없었던 ‘오류’가 인간 해석의 과정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원죄’, ‘뱀을 사탄으로 보는 해석’ 등은 창세기 ‘사후의 생애’의 산물이며 본문의 올바른 해석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잘못된 해석, 즉 인간의 환상과 오류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창세기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극대화되는 현대에서 더 이상 우리 인류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까? 앞서 언급한 많은 전문가의 예견처럼 창세기의 ‘사후의 생애’에 이제는 사망선고를 내려야 할까?
바로 이 부분에서 “환상과 오류는 인간의 삶과 인류 집단기억의 필수 요소”라는 니체(Friderich Nietzsche, 1894~1900)의 교훈이 빛을 발한다.7) 사실 과학의 역사도 환상과 오류로 점철된 역사였으며, 그것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전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오류는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오류조차도 우리 인간에게는 소중한 지혜의 보고가 된다. 왜냐하면 환상과 오류조차 우리 인간의 오류이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의 경우처럼, 창세기 해석의 오류를 통해서 창세기 본문의 생애, 즉 원래의 의도에 우리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창세기는 본문의 생애와 사후의 생애가 서로 얽혀 있으며, 이러한 창세기의 삶은 우리 인류가 생존하는 한 함께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 특별히 신앙의 성장 과정 중에 있는 한 개인에게 중요한 점은 바로 상상력이다. 그리고 창세기는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오히려 풍부한 상상력에 자극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인뿐 아니라, 자라나는 교회학교 학생에게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 좋고 또한 지혜가 넘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이 해석하는데,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한계와 겸손함을 가르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주입식 또는 강제적 교육보다는 현대 과학의 내용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특별히 창세기가 충분히 서로 양립될 수 있다는 자기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가 교회 교육환경에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교육’이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6) Walter Benjamin, ‘The Task of the Translator’, Illuminations: Essays and Reflections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73; “원작은 사후의 생애에서 변화한다. 원작의 생명이 변형되지 않고 갱신되지 않는다면 이는 ‘사후의 생애’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7) 로널드 헨델, 『창세기와 만나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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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구성 요소로 바라본 교회학교 교육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 교사, 2) 학습자, 3) 교육 내용의 3가지 구성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실제적인 면에서 공교육에서 통합과학을 배우면서 교회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배우는 학생에게 균형 잡힌 신앙을 주기 위한 교육의 구성 요소 중 교사와 교육 내용을 생각해 보았다.
1) 교사: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와 교사
교회학교를 책임지는 목회자와 교사는 우선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선이해가 꼭 필요하다. 즉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통전적으로 성경을 읽는 관점을 먼저 가져야 한다.
더불어 목회자와 교사는 현대 과학에 대하여 전문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통합과학에서 빅뱅우주론과 진화론에 대해 배우지만, 이런 과학의 내용이 창세기에 기술된 우주와 인간의 창조와 서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질문하는 그 내용 자체를 교사들이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성경의 문자대로 믿으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더 이상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나 교사를 신뢰하지 않은 채, 교회에 와서는 그저 입을 다물 것이다.
물론 목회자와 교사가 과학전공자가 아니라면, 과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과학이 왜 어렵냐고 물어봐서는 안 된다. 그냥 과학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목회자와 교사가 전문 강사를 초청해 함께 공부하는 방법도 좋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 등의 전문사역기관에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 또는 유투브에서 「한국교회탐구센터」의 “과학과 신앙에 대한 101가지 질문”이라는 동영상을 보면 훨씬 도움이 된다.8) 그럼에도 만일 학생들이 질문하는 과학과 성경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에 대해 잘 모르면, 솔직히 ‘잘 모른다’라고 대답해 주는 편이 성령 청원 기도보다 훨씬 낫다. 이렇게 솔직한 대답 후에 수학 문제의 답을 찾는 방법보다는 아이별로 ‘최선의 설명’을 찾아가는 과정을 교사가 함께 해주는 것이 신앙적인 면이든, 교육적인 면에서 좋다.
2) 교육 내용: 주일학교 교재의 필요성
성경의 내용을 알려주는 교회학교 교재들은 교단별로, 또는 초교파별로 매우 다양하며 그 내용은 훌륭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잘못 집필된 내용들이 교회학교 교재에서 종종 발견되곤 한다. 물론 이런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한 대로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나 교사들도 현대 과학의 내용에 관해 과학전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다행히 지난 2022년 과신대에서 과학을 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Q&A: 창조와 진화, 인간의 기원에 관해 가장 궁금한 38가지 질문』9)이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중요한 주제들에 관한 기본 안내서를 한국교회에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의 내용과 성경의 내용이 마치 충돌하는 것 같아 고민하는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물론 학생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초등부 교회학교 학생이 직접 접근하기에는 좀 어려울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과학과 신앙을 균형 있게 가르쳐 줄 연령별 교회학교 교재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에는 신학자와 그리스도인 과학자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 있는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와 교사들의 연대와 협력이 꼭 필요하다.
8) 최근 과학책을 소개하고 과학책으로 영상을 만드는 채널이 ‘북툰 사이언스’에도 교회학교 담당 목회자나 교사들이 보면 좋은 영상이 많다.
9) 바이오로고스·우종학, 『과학과 신학의 대화 Q&A』, 김영웅 옮김 (서울: IVP,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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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칼럼🖋]
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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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과학과 신학의 대화”, 즉, “과학신학” 분야가 최근 신학계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분야다.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 대학들을 중심으로 ‘기포드 강연’이 매년 열리는데, 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되는 분이 보통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자다. 자연신학을 강조하며 1887/8년부터 시작된 기포드 강연의 강사들 중 일부만 살펴보면, 윌리엄 제임스(『종교경험의 다양성』), 화이트헤드(『과정과 실제』), 베르그송, 존 듀이, 슈바이처, 아놀드 토인비, 불트만,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리처드 스윈번, 몰트만, 스탠리 하우어워즈, 앨빈 플란팅가 등의 학자들이 있다. 과학자들 중에도 하이젠베르크, 에딩턴, 닐스 보어 같은 학자들이 강연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강연을 한 분야의 학자들은 과학과 신학을 연계해서 공부하는 학자들이다. 이안 바버, 아서 피콕, 존 폴킹혼,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 수많은 과학신학자들이 강연을 했고, 기포드 강연에서 과학신학 분야의 강연을 연구한 책도 출간되어 있다(『신학과 과학의 만남: 기포드 강연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분야는 진화생물학, 빅뱅우주론 등이 신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룰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시대, 즉, 가상현실시대, 인공지능시대, 4차 산업혁명시대 등 우리들이 직면할 시대에 대한 신학적 반응들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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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학대학에서의 과학신학 강의 현황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활발해지면서 신학대학(원)에 과학신학 전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GTU를 중심으로, 영국은 옥스퍼드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전공자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유럽의 여러 학교들도 점점 “Science and Religion(Theology)”을 하나의 전공 분야로 도입해 가고 있다. 과학과 신학 분야 최대 규모의 학회는 “과학과 신학 유럽 학회(European Society for the Study of Science and Theology)”로 2년에 한 번씩 5박 6일간 유럽에서 개최된다. 또한 아서 피콕이 초대 회장을 지낸 “과학과 종교 포럼(Science and Religion Forum)”은 매년 2박 3일간 영국에서 개최된다. 매년 개최되는 미국종교학회(AAR)에서도 과학신학이 한 분야로 논의되고 있고, 여러 과학신학 센터에서 학회들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 신학계의 경우, 장신대,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대학에서 과학신학 과목들이 조직신학/종교철학 분야에서 개설된다. 특히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는 10과목 이상 개설된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과 세계관(전교생 교양필수)”, “과학과 영성”, “과학과 신앙”, “진화론과 기독교”, “자연과학과 신학”, “인간과 미래”, “뇌과학과 종교”,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종교와 과학철학”, “교양과학” 등의 과목들이 종교철학전공을 중심으로 개설되고 있다.
과학과 관련해 신학을 논한다는 것에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다. 언뜻 보면 현대 과학과 신학은 상충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현대 수학을 받아들인다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수학과 신앙이 무슨 관계라고 저런 질문을 할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과학자는 베토벤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색하다면, 과학과 신학이 충돌한다는 생각도 어색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신학이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둘 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근대과학의 발전을 이끈 과학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질서정연하고 내적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당대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논한 책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해”와 “달”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책이다. 세상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강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앞으로 더 엄밀한 과학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뒤집혀 질 수 없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현실감 있게 느끼고, 태초에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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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창조과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 시대에 과학이 성경을 지지해 준다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창조과학이 제공하는 거짓 평안에 갇혀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데, 왜곡된 주장들은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게 만들 뿐이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도 비판을 받지만,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과학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성경이 과학적 내용을 다루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쯤을 배웠을 것이다. 성경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초월적 세계,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를 다룬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되기에 믿을 수 있다면, 성경 말씀이 아니라 최첨단의 과학을 믿으면 된다. 실제로 최첨단의 과학을 신봉하는 종교들도 있다(사이언톨로지, 라엘리안 무브먼트,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
성경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만, 혹시라도 증명이 된다면, 더 큰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창세기 1장이 과학으로 증명 가능해서 믿을 수 있다면,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의 기적과 부활 사건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창세기 1장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학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적 원리를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해 역사하신다. 인간이 발견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원리들일 뿐이다. 중력을 만드신 하나님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중력(표면장력)을 초월하실 수도 있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를 침범하는 절대 군주의 모습보다는 설득하시는 방식으로 종종 다가오신다.
또한 창세기 1장이 기록되고 전승되었던 당시에 사람들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문자와 문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회당에서 말씀이 낭독될 때 문자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핵심에 주목했다. 문자주의적 이해는 누구나 텍스트를 직접 접하게 되면서 생겨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문자 자체에 얽매이면,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문자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 현대 과학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 문화, 역사, 세계관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성경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신학대학에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신학생들은 성경과 더불어 과학적 상식들도 충분히 함양해 과학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풀어내는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비과학적이며 반과학적인 내용이 믿음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약 1600년 전에 경고한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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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복음이라는 씨앗은 좋은 토양에 뿌려져야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한때는 토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곳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모든 문화가 교류되는 글로벌 시대,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과학 시대는 과학이라는 토양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신학은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필자는 과학신학이 수천 년간 이어진 기존의 신학 담론들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수천 년간의 신학적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자는 말이다. 과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신론의 공격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들에게 과학신학의 담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제대로 증언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책들은 최근 수십 년간 많이 출간되었다. 그 중 필자가 번역한 두 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창조의 본성: 과학과 성서 사이에 다리 놓기』와 『과학시대의 신앙』이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초점을 둔 반면, 『창조의 본성』은 과학과 ‘성서’에 초점을 두었고, 『과학시대의 신앙』은 과학과 ‘신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후자가 좀 더 읽기 수월할뿐더러 여러 흥미로운 주제들을 담고 있어서 더 추천할 만하다. (후자의 책은 ‘과신tube 채널’과 ‘과학과신학연구소’ 채널에서 필자의 강의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들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과학을 바탕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주의’에 빠져가고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생성형AI(ChatGPT), 인공지능, 메타버스,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 앞으로 제기될 여러 주제들에 대해 신학계와 교계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할 때, 기독교는 한국사회에 계속해서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것이다. 필자도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더욱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유튜브 채널 “과학과신학연구소”를 공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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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팀 이야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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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양현 편집장
더불어행복한교회 협력 목사 과신대 제주 북클럽지기
“과신뷰 편집장을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표님의 전화를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과학에 무지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그래 배워가면서 하면 되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 일이 어느새 일 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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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 과신뷰를 사랑해 주시고 정성스레 읽고 피드백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무엇보다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가 없다면 우리의 일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독자로 인해 더욱 빛날 것이기에 앞으로도 아낌없는 구독과 피드백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매월 주제에 맞춰 글을 써 주신 기고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로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 중 하나였습니다. 늘 촉박한 시일을 앞두고 원고 청탁을 해야 했던 점이 가장 죄송했고, 마감일 앞두고 본의 아니게 독촉해야 했던 점도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고 일한 이슬기, 박아론 간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헌신과 노력이 과신뷰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과신뷰를 통해 무엇보다 우리 과신대의 취지에 맞는 주제의 글들을 올리려 했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글을 독자분들께 보내드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매월 두 분의 전문가에게 글을 의뢰했습니다. 과학자 한 분과 신학자 한 분께 공통 주제를 부탁드려 균형을 잡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회자되고 관심 있는 주제의 글을 올리려 노력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니, 인공지능과 기독교, 지구, 지질과 화석, 과학과 신학의 대화, 우주론의 신학적 이해, 기후위기 시대 살기, 환경에 대한 적을수록 풍요롭다, 자유의지와 뇌 결정론, 교회와 신학교에서의 과학 교육 등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아울러 우리 과신대를 위해 수고해 주시는 이사님들을 매월 인터뷰 형식을 통해 소개해 드리려 했고, 그 달의 책, 과학과 관련 있는 영화, 우리 과신대의 든든한 활동 그룹인 북클럽 소개 등을 아울러 담아내려 했습니다.
첫해를 보내며 편집팀의 한계도 느꼈습니다. 과학의 전문가들이 아니다 보니 이슈들에 다소 둔감한 점도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내년에는 더욱 이 부분에 보완하고자 합니다. 과신대 후원 이사님들의 전문적인 도움을 적극적으로 부탁드려 더욱 완성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마침 글을 쓰는 이 시점에 하늘에서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은 온 대지를 소리 없이 덮어서 흰색의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 과신대와 과신뷰의 글과 포럼 등이 눈처럼 내려 이 시대에 바르고 균형 잡힌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가능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 해 동안 우리 과신뷰를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집장 김양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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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아론입니다. 사진은 해외사진 아니고 엠티 사진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연초에 시작한 과신뷰가 어느덧 마무리가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앞으로도 좀 더 옹골찬 소식으로 후원자님들께 찾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과신뷰가 학술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소소한 과신대의 소식지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바라봅니다. 물론, 이제 저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더 좋은 분들이 이어 나가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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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슬기 간사입니다. 스티비로 이사한 후 벌써 10번째 뉴스레터네요. 올해 새롭게 리뉴얼 된 과신뷰 어떠셨나요? 메일 구독의 특성 상 피드백을 쉽게 확인할 수 없다보니 그동안 구독자 여러분들이 어떻게 봐 주셨을지도 궁금하고, 과신뷰에 참여해 주신 필자 분들의 소감도 참 궁금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올해의 과신뷰에 대해 피드백을 남겨주신다면, 내년에는 좀 더 여러분이 바라시는 내용과 포멧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 )
아쉬운 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휴재 없이 ‘과학과 신앙의 다양한 시선’을 잘 담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께도 닿았기를 바라고, 과신뷰의 글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작은 유익이라도 얻으셨기를 바라봅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을 모으고 쌓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 정회원 여러분들 중 과신뷰 사역에 함께해 주실 분들은 언제든 대환영입니다. 🙌 이 사역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주변에 과신대를 소개하기 원하시는 분들도 스티비 구독 링크(scitheo.stibee.com)를 활용해 주세요. ^^
그럼 추운 날씨 모두 안녕하시길,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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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과신대 사무국을 지키고 있는 행정팀장 박아론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지요?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되다니 시간이 참 빠른듯합니다. 이번 사무국 소식은 제가 후원자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쓰는 글입니다. 네. 저는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행정팀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후원자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동안 과신대 사역에 동참하면서 많은 분들을 뵙고 듣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동안 제 교단 신학에만 갇혀 있는 것 같았는데 과신대를 통해 견문이 넓어지며 저를 넘어설 수 있는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부족하지만 응원의 메시지와 단체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동역자의 마음으로 잦은 실수와 부족함에도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은 사랑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과신대를 응원하겠습니다. 그럼 제 이야기는 이만 줄이고 사무국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사무국에서 회원의 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시점으로 본다면 벌써 다음 주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회원의 밤을 통해 후원자님들과 교제하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옛말에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라 하여 뜻이 맞는 친구가 찾아오는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비록 서로가 얼굴은 모를지라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균형 있는 창조신앙’이라는 뜻을 가지고 한데 묶인 동지들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렙니다. 온라인 송출도 준비되어 있으니 많이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2024년은 사무국도 정신없이 바쁠 것 같습니다. 1월부터 기초과정과 핵심과정 프로그램들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또 다양한 과학적 이슈와 신학적 고민들을 가지고 포럼이 진행될 것이고요. 올해 한 해를 지나며 느꼈던 부족함을 잘 채워 가고 더 탄탄해질 것이라고 기대가 됩니다. 저는 물러가지만 새로운 간사님이 훌륭하게 해내리라 믿습니다. 후원자 여러분들도 지금처럼 단체를 위해 많은 관심과 지지, 기도와 격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큰 산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넓은 바다는 가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깊음을 이룬다고 하는데 과신대가 큰 산과 넓은 바다처럼 거대한 담론뿐만 아니라 작은 담론도 포함할 수 있는 열린 대화의 마당이 되길 소망합니다. 과신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한국 교회의 변화가 조금씩 움트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무국에서 제 이상한 소리(?)를 잘 받아주신 이슬기 간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저는 이만 총총
박아론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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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소식 📧
1. [과신대 포럼.zip] 뇌과학과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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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에서 뇌과학 포럼 패키지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패키지는 "뇌과학"을 주제로 열린 2회 포럼과 5회 포럼을 모아볼 수 있는 패키지 입니다. 뇌과학자들과 철학자, 신학자의 대화를 통해 뇌, 의식, 영혼, 자유의지 등 논쟁적인 주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지금 바로 신청해주세요. ^^
🔸 내 용 : 2회 포럼(뇌과학과 기독교적 이해)과 5회 포럼(자유의지와 뇌결정론) 강연 및 대담 영상
🔸 수 강 료 : 일반 2만 원 (정회원 1만 5천원)
* 입금계좌 : 농협 301-0273-9359-91 (예금주:과학과신학의대화) 입금자명 예: 홍길동_포럼
* 등록 취소 및 환불은 입금 후 24시간 이내에만 가능합니다.
🔸 신청 기간 : 23년 12월 29일(금) 까지
🔸 시청 기간 : 23년 12월 25일(월) ~ 24년 1월 5일(금)
🔸 시청 방법 : 영상 링크 및 자료집 메일 발송
* 재수강, 부분 수강 신청자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scitheo.office@gmail.com / 010-2397-4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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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뮤니티
- 교사 모임 : 교사 정기 모임은 12월 30일(토) 오후 7시 반, 줌으로 만납니다. 다음 세대에게 균형 잡힌 창조 신앙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 교사 모임 선생님들을 응원해 주세요.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교사 모임 참여에 관심 있는 선생님들께서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 목회자 모임 : 목회자 모임은 매월 둘째 주 월요일 저녁에 온라인으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정회원이 아니어도 과학과 신학에 대해 함께 대화 나누기 원하는 목회자 누구나 환영합니다. 다양한 사역 현장의 경험을 나누고, 목회 현장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연대하고 공부하는 목회자 모임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참여 신청 : https://bit.ly/3szaY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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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은 정회원들이 직접 주관하고 참여하는 독서 모임입니다. 모임 참여는 사무국으로 문의 바랍니다.
#샤르댕_북클럽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홍성욱 저
12월 14일 목요일, 저녁 8시 / 온라인 zoom
#관악_북클럽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저
12월 18일 월요일, 저녁 7시 반/ 더처치 비전센터
#성서와여성_북클럽
《예수의 어려운 말들》 에이미질 레빈 저
12월 26일 화요일, 오후 7시 / 온라인 zoom
#제주_북클럽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정한욱 저
12월 26일 화요일, 오후 7시 / 제주 더불어행복한교회
#분당판교_북클럽
《교회를 찾아서》 레이첼 헬드 에반스 저
12월 28일 목요일, 저녁 7시 / 성공회 분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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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신청 및 문의
분당판교_정훈재 북클럽 지기 (hunjae@gmail.com)
제주_김양현 북클럽 지기 (fisherkim30@gmail.com)
샤르댕_박소은 북클럽 지기 (esthera@nate.com)
성서와여성_김란희 북클럽 지기(urbanlite@naver.com)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 (scitheo.office@gmail.com / 010-2397-4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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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3년 11월 재정 보고
이번 달 재정은 수입 7,079,691원, 지출 6,895,200원입니다.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이번 달도 과신대 사역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재정 보고는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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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과신대
과신대는 구독자 여러분의 기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채택된 분들께는 2만원 상당의
기프티콘이 제공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주제 : 자유기고 / 다음 호 주제 칼럼
분량 : 워드 or 한글 4매 이내
제출 : scitheoeditor@gmail.com
* 편집 사정에 따라 해당 기고문이 실리지 않거나
다음호에 기재 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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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 이달책
《생물학자의 신앙고백》
- 부제 : 책 내용은 별로 없는 실전 책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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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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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모든 인간은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이 사람이 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 그것이 바로 ‘발생생물학’이다. 인간은 어떻게 단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될 수 있을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되고, 이 수정란이 다양한 세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신앙의 여정을 같이 풀어놨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신간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은 발성생물학을 통해 신앙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이다. 저자와 함께 과학적 사실을 통해 신앙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담백한 신앙을 마주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하나님의 일반 계시인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형성되는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럼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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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기 전에 처음으로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접촉에는 단순히 정자의 이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호르몬과 세포들의 합작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자가 난자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여러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정자는 여성의 몸에 있는 세포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세포이다. 여성의 질과 자궁, 그리고 나팔관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이때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자는 과활성화(hyperactivity) 단계에 들어서게 되고 강하고 빠른 정자가 되는 일종의 성숙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비로소 이때에 난자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이미 우리 모두가 경험한 사건이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궁을 지나 나팔관을 통과한 순간들을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성숙을 겪고 어려움을 통과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러한 성숙은 정자에게 생존의 문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이 않나 생각해 본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달려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계속해서 성숙을 향해 달려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신앙적 비유를 통해 삶과 연관된 신앙을 좀 더 밀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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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수정이 완료된 수정란은 이제 낭배 형성의 단계로 들어간다. 이 배엽의 분화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를 두고 저명한 발생학자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인생에서 진정 최고로 중요한 시기는 출생도 결혼도 죽음도 아닌 낭배형성이다.” 바로 이 시기에 낭배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체의 각 신체기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로서 하나는 분화가 되지 않다 샴쌍둥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 장기가 분화되는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외배엽, 중배엽, 내배엽으로 분화가 되기 전에 일종의 원시선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원시선이 비정상적으로 유지되면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장애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원시선은 금세 사라지고 낭배형성이 되며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으로 나뉜다. 이후 내배엽은 소화계, 내분비계, 호흡계 기관으로 분화되고 중배엽은 근골격계, 순환계, 생식계, 배출계 기관으로 외배엽은 신경계 기간과 상피조적으로 분화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가지 배엽은 이내에 곧 사라진다. 저자의 말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신앙의 모습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할 때 받아들이는 신앙의 전통은 굉장히 익숙하고 당연한 문화이다. 때론 자부심을 갖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낭배 분할이 될 때 그 ‘원시선’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게 된다면 배아에 치명적 상황, 결국 배아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단 신학이나 신앙 전통만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발달도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율법이 은혜를 깨닫는 수단은 될 수 있어도 율법이 은혜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바리새인으로 남는 것과 비슷한 예일까? 사도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율법은 은혜를 위한 ‘원시선’에 불과한 데 말이다. 우리에게 성숙이란 사람으로서 자라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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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수정란으로 시작한 우리도 각 단계를 밝아가며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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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확신이 없는(?) 부분이라면 노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저자도 글을 쓰는 필자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도 노화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선에서 글을 적어내려간다. 노화는 세포가 분열하는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이야기한다. 좀 더 물리학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몸이 점차 무질서한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무질서에 저항해 질서를 만들어내었다면 노화과정은 이제 질서를 만들어내던 몸이 점차 무질서를 향해 다시 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무튼 노화의 시기에 이르면 신체의 모든 기관은 효율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 질병들도 생겨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노화란 무엇일까?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고한 태도를 갖는 꼰대로 남아있게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로 남게 될까? 인생의 선배들은 인생의 황혼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자기중심성과 혈기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과 내어줌이 있지 않을까? 필자는 여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친필을 소개하며 죽음, 고통, 원망보다는 성실한 사랑이 되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모습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가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케노시스 창조이론’에서 읽었던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죽음과 고통의 문제,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죽음과 고통을 다른 생명체를 위한 내어줌으로 설명하던 그 글이 생각났다.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보면서 오히려 그것을 십자가의 희생 비유로 풀어내던 그 글이 생각났다. 한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그것을 ‘내어줌’과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도 노년의 마지막으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내어주므로 우리의 육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어주므로 시작해서 내어주기 위해 성숙하고 마지막으로 내어줌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그런 삶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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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생물학자이건 물리학자이건 철학자 건 역사학자 건 ‘신앙’이 있는 자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에서만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신앙이 성장하고 무르익어 갈수록 성경을 벗어나 결국 이 모든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고 계시는 세상임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 마주치는 그 은혜를, 신앙고백을 이 책에서는 제5부 신앙의 여정에서 잘 그려냈으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라도 삶 속에서 마주치는 에피소드는 각자 고유의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인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꽃 파는 화원’의 신앙고백, ‘샐러리맨’의 신앙고백 등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만들어나가기를 소원한다.
한 줄 평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은혜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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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 하*신 / 한*현 / 한*승 / 한*우 / 한*석 / 한*은 / 한*선 / 허* / 허*경 / 허*훈 / 허*영 / 허*한 / 홍*근 / 홍*경 / 홍*근 / 황*영 / 황*욱/ 황*현 / 황*미 / 황*혁
총 328분께서 11월 한 달 과신대를 재정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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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독자의 소리>
과신뷰 Feedback
조형철 님 : 솔직히 기독교와 뇌과학이 무슨 상관이야? 뇌과학은 과학자들이 돈벌이하려고 얘기하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했습니다. 또 각 단위로 존재하는 것들이 유기체적으로 모이면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도 기초지식이겠지만 들어보지 못한 거라 흥미롭네요. 기독교에서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던 자유의지의 논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자유의지로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와는 약간 다르다고 개인적으로 느꼈는데요 이번 포럼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글로 만나게 되니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편집자에게 하고 싶은말
조형철 님 : 포켓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을까요? 있다면 피카츄와 같이 포켓볼 밖에서 살 수 있는 선택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ㅎㅎ
그러게요.. 나중에는 동물신학 전문가님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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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님과 소통하며 <과신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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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신학의대화 과신대 scitheo.office@gmail.com 서울시 종로3가 삼일대로 428 낙원악기상가 5층, NPOpia 50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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